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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부검과 관련한 역사적 이야기들

imkien 2017. 11. 4. 22:46

법의학과 관련한 부검의 역사에 있어서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를 5세 등등 그리고 만약 안토니오 가리도의 유명한 저서인 <시체 읽는 남자>를 읽어봤다면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서로 평가 받은 <세원집록>을 집필한 송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법의학 부검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초와 관련한 인물들 입니다. 그리고 법의학 부검은 현대에 있어서도 증거를 얻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야이지요. 오늘은 법의학 부검과 관련한 이야기를 살짝 해보도록 하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그리고 그의 부검




로마 원로원의 계획에의해 기원전 44년 암살 당시 그는 총 23번 칼에 찔렸지요 하지만 부검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그 중 오직 딱 하나의 부상만이 그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외과의였던 안티스테우스는 23번이나 칼에 찔린 카이사르의 시신을 부검했는데, 카이사르는 얼굴, 배, 사타구니, 팔 등등 몸 도처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요. 23번이나 찔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티스테우스는 카이사르의 죽음은 가슴에 찔린 상처 중 하나인 상처 그중에서도 심장을 찌른 상처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날 의학 검시관에게 있어서도 어떠한 상처가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또 강력한 증거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왜냐면 검사는 살인 사건에 있어서 인관관계가 있음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죠. 즉 피고인의 행위가 피해자의 사망을 유발했는지에 대한 증거 말입니다. 





송자의 세원집록 최초의 부검에 관한 살아있는 저서




 송자는 13세기 초 <세원집록> 이라는 '검시 수칙'에 대한 책을 집필 했습니다. 이 책은 수세기 동안 그 명맥을 유지했으며 법의학 부검의 역사에 있어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지요.  앞서 언급한 안토니오 가리도의 책인 <시체 읽는 남자> 라는 책을 읽어보신다면 중세 중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법의학 병리학자의 삶에 대한 매력적인 이야기를 읽어보실 수 있을겁니다. 


시체를 읽는 남자에서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서는 희생자의 상처를 분석하는 것 만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는데 상처의 모양을 통해 살인자가 낫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내고  모든 농부들의 낫을 회수하길 요청했고 낫의 주인들에게 자백을 요구하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자 그 낫 중 하나에만 파리가 꼬인 다는 것을 통해 범인을 찾아냅니다. 유독 그 낫에 파리가 꼬인 이유는 그 낫에 베인 혈액의 향 때문이었고 범인인 그 낫의 주인은 결국 자백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이죠. 어찌보면 약간 어설픈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로 법의학에서는 자상을 통해 무기의 종류를 판별해 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송자는 그러한 중국의 법의학 관련해서 서적을 지은 사람이지요. 





카를 5세에 의한 살인사건에 대한 최초의 부검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1532년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경우 부검을 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법령을 마련합니다. 이 법은 1835년 뵈닝하임의 시장이었던 하인리히 리버가 살해 당했을 때도 적용되었지요. 그것은 오직 신체의 피부 부분만 검사가 요청되었고 의사들은 그것만을 수행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법은 법의학 부검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푯말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살인 사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수긍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부검의 표준화는 1876년 독일의 의사이자 병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Rudolf Virchow (루돌프 피르호)가 부검 기법에 관한 그의 논문을 발표한 후 시작되었습니다. 피르호 이전에는 부검은 정규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즉 정해진 규칙이나 규준이 없이 부검이 행해졌던 것이지요. 그렇다보니 사인에 대한 발견이나 증거의 발견에 있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르호는 병리학자들이 절차를 따라 부검을 하게 했고 더 많은 근거를 통해 부검을 시행해서 더 많은 단서를 찾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법치의학




미국의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는 폴 리비어는 단순히 한밤중에 말을 달려 영국군의 공습을 전한 인물이 아닙니다. 폴 리비어는 미국의 첫 번째 법의학 치과의 였습니다 마치 법의학 부검의처럼 말이죠  이 은세공업자였던 인물은 한편으로는 아마추어 치과의로써 동물의 치아로 의치 혹은 틀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리비어의 친구인 닥터 조셉 워렌은  벙커 힐 전투 이후 실종이 되었습니다. 몇달 후 대량살상 무기에 의해 살해 당한 114명의 시체를 찾았고 리비어는 하마의 어금니를 이용해 만든 틀니를 착용하고 있던 자신의 친구의 시신을 확인하게 되었죠 친구인 조셉의 얼굴은 총상으로 인해 거의 날아가고 알아볼 수 없었기에 시신의 신원을 확인 할 수 없었지만 리비어에 의해 친구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친구이자 영웅인 조셉에게 비로써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법치 의학 시신의 신원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폴 리비어가 수행했던 것이지요. 오늘은 역사 속에서 법의학과 관련한 이야기에 관해 살포시 포스팅 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살인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의학의 역사에 관해 아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되는 것 같군요. 어쩌면 우리에겐 시신을 다룬다는 것은 매우 생경한 분야일테지만 우리가 범죄수사물 미드를 통해 보게되는  법의학자들의 부검 장면을 통해 조금은 더 이 분야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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