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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약산 김원봉은 누구인가?

imkien 2016. 9. 17. 20:52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배역을 맡은 김원봉  어떤 인물일까요? 사실 김원봉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현대사에서 많이 회자되지 못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이유는 우선 여운형은 중도 좌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김원봉은 월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독립운동가 특히 건국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은 이승만과 비교해 엄청 저평가 받은 인물들 입니다. 

영화 암살




하지만 당시 김원봉과 여운형은 국내에서 인정 받은 독립운동의 거두들이었고 몽양 여운형 같은 경우 패망한 일본의 총독부가 조선내 일본인들 퇴각을 놓고 여운형에게 협상을 요구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사실 이들만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한 인물들도 흔치 않습니다. 이런 김원봉이 영화 암살에 나와 다시 한번 재조명 받을 기회를 갖데 되었는데요, 오늘은 이 약산 김원봉에 관해 포스팅르 해보록 하겠습니다.


아마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하시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들께는 김원봉이라는 이름 석자는 아주 익숙하실 것입니다. 왜냐면 김원봉은 수많은 무장 독립 투쟁을 진두 지휘했고 특히 의열단 활동으로 조국이 일제 치하의 암흑기에 있을 때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함께 희망의 등불 처럼 활동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국가 시험 특히 한국 근현대사 관련해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인 것이죠. 

1. 약산 김원봉의 출생 


김원봉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경성 중앙학교를 졸업 후, 조국의 독립에 그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금릉대학교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만주(서간도)로 이동, 훗날 서로군정서 군대의 모태가 되는 신흥 무관학교에 입학하지만 자퇴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원봉에게 1919년의 한 사건이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의열단을 만드는 계기가 되는데요 그 사건은 바로 3.1운동입니다. 전국민이 일어나 독립을 외치며 비폭력으로 시작된 이 3.1운동을 일제는 총칼로 압제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이런 일련의 추이에 그는 단순 독립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폭력적 혁명 운동이야 말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김원봉

<실제 김원봉의 사진>




2. 의열단 조직하다


만주 길림에서 13명의 단원과 의연달은 조직하고 조직의 맏형(의백)이 된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부탁한 조선 혁명 선언을 노선으로 잡고, 민중의 직접 혁명론에 입각한 국내의 기간파괴 및 요인 암살을 도모하게 됩니다. 여기서 의열단의 기관 파괴 및 요인 암살 시도에 관해 잠깐 살펴보면


1920: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1920.12월: 최수봉 밀양 경찰서 폭파 시도

1921: 김익상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시도

1923: 김상옥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1924: 김지섭 도쿄 궁성 이중교 파괴 시도

1926: 나석주 동척 주식회사,식산 은행 파괴 시도


이렇듯 의열단은 국내의 일본 기관의 파괴 및 요인 암살을 꾸준히 감행하여 일본의 통치하에 조국의 독립이 요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대한 독립의 염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김원봉은 이런 의열단을 맏형으로서 진두지휘하였습니다.

3. 조선 의용대 조직을 조직하다


1930년대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한 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의 도움으로 조선 혁명 간부학교를 난징에 설립하고 혁명 요원을 양성하였다. 이렇게 양성된 청년을 규합하여 한커우의 국민당의 허락하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대장에 취함게 됩니다. 이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 군사 조직이었습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과 지원하에 포로심문, 정보 수집, 후방 교란등의 역할을 담당했었지만  조선 의용대 내의 피끓는 젊은 대원들은 이런 소극적인 활동이 마음에 안들었고 일본 제국주의와 직접 싸울 수 있는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어 이중 일부가 화북의 옌안으로 가서 당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팔로군과 연합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가 후에 조선 의용군이 되게 됩니다.


김원봉은 남은 조선 의용대를 데리고 충칭으로 가서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과 합류하게 되고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한국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길 원했지만 임정내 우파세력들과 마찰로 그렇게 되진 못했습니다.




4. 해방 이후의 약산의 활동


해방 이후 만주주의 민족전선에 합류 좌익 합작운동을 이끌던 여운형과 그 뜻을 가치하는데, 여운형이 1947년 암살되자 좌우 합작운동이 흐지부지 되고 자신을 따르던 단원들이 대부분 월북하는 상황에서 결국 김원봉도 1948년 남북 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참석차 북한에 갔다가 북에 남게 됩니다. 


초반 북한 정권이 수립된 후에 여러 고위직을 거치게 되는데 이후 점차 세력이 커진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를 제거하며 같이 실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북한내에서도 김일성의 독재체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김일성 체제당시 비판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된 것으로 보아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 월북을 한것은 어쨌든 독립후 국내의 정황이 그가 생명을 담보로 끊없이 추구했던 독립국가의 그것과는 달랐고 결국 그당시 일본의 제국 자본주의에 반하여 유행했던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무장 독립 투쟁을 평가 절하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80년대 90년대에는 아예 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문민정부에 들어서며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고 또 재평가를 받아 이제는 교과서에도 나오고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긴 했지만, 독립 유공과 관련해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란 것을 알기에 조금은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훌륭한 독립운동가였고, 한국의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열혈남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영화 암살을 통해 약산 김원봉이 다시한번 재조명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암살 관련 포스팅은 여기>

'암살' : 현대사의 어긋난 단추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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