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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바꾼 결정적 전투들

imkien 2017. 10. 24. 23:26



서부 유럽에서부터 러시아의 대평원까지 그리고 태평양과 중국까지 2차세계 대전의 엄청난 확장은 수많은 인명의 손실을 낳았고 더불어 전쟁이 치뤄지는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했던 전쟁에서 연합군이 승리 하기까지 수많은 전투들 있었지요. 오늘은 2차세계 대전의 전황을 변화시켰던 중요한 전투에 대하여 간략하게 포스팅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국 전투

 

1940 6 독일군의 전격적인 공습에 의해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은 독일의 침공에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영국 해협을 건너기 전에 그들의 공군의 우세를 믿고 잠재적인 위협이 있는 영국 왕실의 공군을 미리 제거하기 위한 임무를 받았지요. 하지만 영국에는 다우딩이라는 걸출한 사령관이 있었고 그의 공군은 열세임에도 수비적인 작전으로 독일이 자랑하는 공군의 지속적인 공습을 막애내기 시작합니다.(물론 작전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을 초래하기게 되어 나중에 다우딩은 욕을 먹기도 합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스핏파이어와 호커 허리케인은 지상의 레이더 컨트롤러에서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끈질긴 방어력을 선보였고 영국의 공군기지의 방어망을 뚫으려고 했던 독일의 공군은 결국 런던 폭격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여전히 작전을 펼칠 있었던 영국 공군은 독일의 공군은 Luftwaffe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의 침공에 대한 무기한 연기를 명할 밖에 없게 됩니다. 





 

 

◆ 모스코바 전투(공방전)

 

1941 6 독일은 그들의 군대가 소련을 침략하기 위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합니다. 동부 쪽을 열고 들어간 독일 육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2달이 조금 넘는 진격과 싸움 가운데 모스크바에 거의 육박하게 됩니다.

소련의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군들은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한 태풍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함락 시키는 것은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에게 타격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당시 소련은 공업 생산량에서 독일을 앞서 있었고 그로인해  전력면에서 소련은 독일에게 뒤지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군대를 지휘할 만한 지휘관이 없었죠 이유는 스탈린의 정권 장악을 위해 많은 지휘관들이 숙청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지휘관 훗날 독소 전쟁의 영웅이라고 칭해지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있었지요. 소련은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레닌 그라드에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를 불러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당시 명령의 혼선으로 인해 주춤한 독일군으로 인해 튼튼한 거점 방어망을 구축할 있었고 우랄 산맥 동쪽에서 보급된 군수 물자를 가져와 배치 있었습니다.

 

주코프는 12 반격을 통해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한 독일과 소련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어갔지만 소련은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동부전선의 전황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브 공방전과 더불어 동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하고 참혹한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지루한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인해 더욱더 다급해 것은 독일군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게 된것에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 빨리 동부전선의 소련을 점령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연료를 먼저 고갈시켜야 한다고 봐서 소련 남부의 유전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의 이름을 도시는 볼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카스피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요충지였기에 이곳을 점령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상당히 숨통이 트일 있었지요.

 

1942 9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이 이끄는 독일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 거의 육박했습니다. 그리고 전투 초기에는 독일 공군의 스탈린그라드에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지요. 이로인해 스탈린그라드는 초토화 되었지만 군의 사기와 스탈린그라드의 방비를 위해 민간인이 움직이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무너진 폐허를 거점으로 소련은 62군과 64군이 방어를 하였고 그로인해 그대로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연이 이어졌습니다. 11월까지 이어지는 공방속에서 독일군은 느리지만 전진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실레프스키와 게오르기 주코프가 입안한 작전을 통해 소련은 대규모 공세로 전황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작전은 시내의 독일군을 붙잡아 두고 오히려 소련군이 외부에서 독일군을 두겹으로 감싸 포위하는 일명 천왕성 작전이었지요.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생각된 작전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성공하게 되고 포위된 독일군은 소련의 엄청난 추위와 떨어진 연료와 식량 그리고 의약품 부족으로 수많은 병사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말에 따라 파울루스는 후퇴도 없었고 결국 1월이 되어서야 항복을 하게 되고 참혹한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투는 동부전선을 넘어 2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 미드웨이 해전

 

일본은 1941 12 7 진주만을 공격하고 필리핀과 동인도가 무너진 태평양쪽을 신속하게 공략한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942 둘리틀 폭격대에의해 일본 본토가 공습되었고 이는 일본을 적지 않게 당황시켰지요. 자신들의 본토가 공격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미국의 최전방기지가 있는 미드웨이 섬을 공략하기로 작전을 세웁니다.

 

미국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은 일본 해군의 규정을 어긴 일본의 암호팀의 병신 짓으로 인해 암호를 해독하게 되었고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사전에 얻게 됩니다. 하지만 진주만의 공습으로 인해 미국은 전함이 한척도 없었고 항공모함도 3척에 불과하여 전력이 일본에 비해 밀릴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한척인 요크타운은 피해를 입어 수리중에 있었지요. 니미츠 제독은 요크타운 호의 가장 핵심 적인 부분만 수리를 명하였고 그로 인해 겨우 48시간만에 수리를 마치고 진주만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은 일본의 미드웨이 공습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이와는 반대로 일본은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되어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에서 안좋게 나오는 결과가 있음에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아닌 시뮬레이션에 대한 결과를 철저히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위에 작전을 세우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미드웨이 해전 개전이 만반의 준비를 방어진에 의해 일본의 공군은 타격을 입었고 또한 미군의 고공강습 부대에 의해  일본의 항공모함인 카가호의 격침을 시작으로 아카기, 히류가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를 입게됩니다. 결국 일본은 미드웨이 공격을 포기하게 되고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한방 먹었던 미국은 일본에게 보기 좋은 카운터를 날려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반전시킬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은 암호 해독에 이은 정보전으로 인한 미국의 기만술의 승리로 볼 수 있는 전투로 명성을 날리게 되기도 합니다.



 


 

◆ 2 알라메인 전투

 

2 알라메인 전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있어 결정적인 전투라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의 유명한 장군 에르윈 롬멜 원수에 의해 이집트로 밀려난 영국군이 반격을 통해 시작된 전투였지요.

 

사실 영국군은 지난 7개월간 독일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어 거의 괴멸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하지만 8월부터 영국군이 증원되었고 몽고메리 장군이 사령관으로 배치되며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울 있게 되었습니다. 롬멜을 빠르게 마무리 짓기 위해 8 마지막밤을 이용해 기습적인 작전을 펼치지만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며 나아가야 했기에 시간을 소비하게 되고 이로 인해 몽고메리의 매복군에 걸리고 말아 오히려 전차를 49대나 잃고 퇴각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영국군이나 독일군이나 완벽한 우세를 점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독일군 쪽에서는 점차 물자가 부족하게 되는데 그들이 보급받기로 물자보다 훨씬 적은 물자만이 보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마저 부상을 입어 본국으로 치료차 돌아가게 되고 기회를 몽고메리군은 1023 전력으로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독일군도 엄청난 피해를 겪었지만 매설된 지뢰로 인해 영국군 역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전황을 유지한 몽고메리로 인해 영국군은 지뢰밭을 돌파하게 되고 결국 물자 부족과 전황을 유지 없다고 판단한 롬멜은 리비아로 후퇴하게 되고 북아프리카의 결정적인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 몬테 카시노 전투

 

시칠리아에서 성공적인 전투작전을 수행한 연합군은 이어 1943 9

 이탈리아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러자 추축국인 이탈리아 군은 전역에 겨울 선이라는 방위선을 형성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는 오래된 도시이고 유명한 수도원이 위치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5군의 진격은 구스타브 라인의 방어선에 의해 막히게 되고 방어선을 뚫기 위해 카시노 인근에서 강렬한 전투가 시작되게 됩니다.

 

로마로 가기 위해선 방어선을 뚫어야 했지만 쉽게 뚫리지 않아서 격렬한 전투는 그만큼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 가장 치열하고 격렬한 전투로 기억되게 됩니다.  연합군은 대규모 공세를 가했지만 번번히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에 저지되게 됩니다. 거기다 무너진 잔해에 독일의 공수부대가 숨어들어 오히려연 연합군을 더욱더 괴롭게 만들기도 했지요. 이런 번번한 실패로인해 해롤드 알렌산더는 디아데 작전을 계획하였고 산악지역 전체를 엄청난 병력으로 감싸기 시작 결국 독일의 커셀링 원수는 공수부대의 철수를 명함으로 치열한 전투는 마감되게 됩니다. 그리고 전투로 인해 독일은 더욱더 패망에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 노르망디 D-Day 전투

 

1944 6 6 드와이트 D 아이젠 하워장군의 지도하에  연합군은 영국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게 되지요. 암호명 해왕성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상륙작전이 노르망디의 상륙작전으로 인해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승리할 있는 교두부를 마련하게 됩니다.

 

D-Day 작전이 진행되기전 연합군은 대규모의 폭격과 함포사격을 하였고 ,,캐나다의 공수부대를 강습투하 시킵니다. 이는 해안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이었죠. 그리고 이렇게 강습한 공수부대는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한채 죽어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독일군의 포탑을 제거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수부대의 강습이후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이루어지는데 유타,포앵트뒤오크, 오마하, 골드,주노,소드 등의 해변에서 전체적으로 전개됩니다. D-Day 첫날 16만명의 연합군 군사들이 영국 해협을 건넜지만 그만큼 피해도 커서 첫날만 거의 1만명의 병력이 손실 것으로 추산되며 그중 45백명에 육박하는 병사들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견고한 독일의 방어로 인해 그들이 첫날 이루고자 하던 목표는 대부분 이루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되는 상륙을 통해 연합군은 점점 거점을 확장해가고 결국 파리까지 수복할 있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 작전으로 기억되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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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지 전투

 

1944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히틀러는 난국을 타개하여 전세를 뒤집을 작전을 계획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1940, 프랑스 전투에서 실시된 전격 작전과 유사하게 방비가 약한 아르덴을 통해 전세를 뒤집는 작전이 수립됩니다.  더불어 영국과 미국을 분열시키고 앤트워프 항구를 점령하려는 추가적인 목표까지 있었지요.

 

그대로 최후의 반격이었던 셈입니다. 12 16 아르덴의  삼림지대를 기갑 부대가 진격함으로써 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더욱이 악천후로 인해 제공권을 접수하고 있던 연합군은 항공기를 띄울 없었기에 독일군은 그들의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 있었지요.

 

깜짝 기습은 초반 며칠동안 아르덴 각지역을 초토화 시키며 연합군을 밀어 붙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전 시행 수일 후에 득달같이 달려온 미군에 의해 이미 저항을 받게 됩니다. 초기 독일군은 연합군의 대응이 늦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유는 연합군이 협의 과정을 거치고 대응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응하여 공수부대인 82사단을 생비트로 101사단을 바스토뉴로 파견하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덕분에 연합군은 시간을 있었고 곧바로 맹렬한 응전을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다 보급의 한계를 넘어선 독일군은 결국 연료와 탄약 고갈이라는 치명타를 맞게 되고 결국 독일군은 바스토뉴 포위가 깨지며 퇴각을 단행 작전을 중지하는 것으로 독일의 대공세는 허무하게 마무리가 되고 이것은 독일의 패망에 완벽한 결정타를 날려 독일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게 됩니다. 애초에 문제가 많았던 계획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실패하게 것이지요.




이외에도 수많은 전투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만, 결국 주요한 전투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독일을 위시한 추축국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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