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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en's story

탈인본주의 & 해제주의 건축 (2) 본문

All My Concern/Library of Architecture

탈인본주의 & 해제주의 건축 (2)

imkien 2016. 8. 22. 22:49

해체주의 건축가와 건축이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여러가지 자율적이고 중첩된 텍스트들 혹은 시스템들은 끊없는 사슬의 의미를 생성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신뢰 할 수 있는 어떤 경험적인 진술이나 이론적인 논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상이한 형태들의 복합적인 단편들을 중첩함으로써, 우리는 의도적으로 어떤 명시적인 형태를 말살하고 그 의미가 애매하고 모호한 형태를 창출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합적인 단편들을 동일한 공간에 중첩시키는 행위가 반드시 끝없는 사슬의 의미를 생산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 끝없는 사실의 의미라고 하는 개념, 즉  하나의 궁극적인 의미를 지연하는 기표들의 끝없는 작용이라고 하는 텍스트 성질의 개념은 단순히 불가능하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비인간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텍스트는 자율적인 사인 시스템으로 주체자를 요청할 수도 혹은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주체자는 그 만큼 쉽게 그리고 무작위적으로 용해되어 버릴 수도 있다. 텍스트의 끝없는 작용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은 텍스트는 자체 내에 어떤 활기론적 원리를 지니고 있어 의미가 자신을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하기 이전에 끝없이 그 의미를 지연시키는 잠재성을 활성화 한다는 논리이다. 이런경우 활리론적인 비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우리가 순응시켜야하는 혹은 길을 들여야하는 어떤 야생동물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문화는 텍스트를 순화시켜 그 의미의 범위를 확정하며 또한 그것에 의해 텍스트를 문화적 도구로 삼는다는 점이다. 텍스트는 그 의미를 구속하는 문화속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텍스트로 되는 것은 해석에 문화적으로 가해지는 구속을 통해서다. 즉 텍스트는 오직 문화가 허락하는 어떤 범위의 의미 내에서만 텍스트로 머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로부터 텍스트를 해방시키고 인간을 텍스트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은 텍스트의 성질이 지니는 문화적 그리고 인간적 차원을 망각하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건축적 담론의 중심을 주체와 객체각의 관계성으로부터 텍스트들간의 상호작용의 관계성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그 기능주의 관념의 덫에 걸려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텅빈, 중립적 형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건축' 그리고 '순수한 기표의 건축'등의 개념과 근대건축가들이 주장했던 표현은 하지 않고 기능만 하는 건축 그리고 어떠한 양식도 갖지 않는 건축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순수한 기표의 건축'은 이미 비의미라고 하는 의미, '중립적인 형태'라고 하는 형태, 그리고 부재의 현존등과 같은 보다 강한 자아적인 메세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소자끼에 따르면 군마박물관의 주 개념은 공허로서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세상에 순환되는 예술작품들을 위한 일시적인 정박지에 불과할 뿐이다 라고 이소자끼는 말했다. 그는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특히 박물관에는 어떠한 확정된 그 자체만의 도상적인 특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특징적이고 확정적인 의미를 피하ㄱ 위해 그는 단순하게 에워싸는 모형 혹은 틀의 형을 택하였다. 그

러한 모형은 너무 단순하고 가치 중립적이어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환기시키지 않는다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얏수카에 따르면 그 박물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건축가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만큼이나 중립적이지도 혹은 비가시적이지도 않다. 예를들면 그 박물관은 자연적인 환경애 끼어 들어 현저한 대조성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건축가 자신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무엇을 표현 혹은 표상하려고 하고 있다. 어떠한 특정의 이미지도 중립화하려고 하는 그 몸짓이 중립성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다. 이소자끼 자신도 기념할 의미의 상실로 인해서 이 기념물은 그러한 상실의 제단으로 둔갑한다 라고 말하며 자기 모순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텅민 중립적인 형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건축 그리고 순수한 기표의 건축이라고 하는 탈기능주의 뒤에 숨어있는 상징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강한 의지를 인지할 수 있다. 해체주의 건축가들이 디자인하고 있는 건축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건축이 아니라 '무의미성'을 의미하는 건축인 것이다. 즉 의미소실에 대한 주장 그자체가 '의미소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자기 자기 모순성은 저자를 떼어내려고 시도하는 아이젠만의 시도에서도 들어난다.  그가 대상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려고 애쓰는 만큼 그는 자신을 그 속에 집어 넣고 있다. 젱크스에 따르면 그는 아이젠만의 건축물에서 일관된 주제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젠만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검은색, 흰색, 그리고 회색의 사각형들이라는 일관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자아를 자신의 대상물로 부터 분리하기 위해 해체주의 건축가는 기하학이라 부르는 초자아에 집착한다. 그러나 텅빈 중립적인 형태, 순수한 기표의 건축이란 말은 자신의 숨겨진 메세지를 강화하려는 수사학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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