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Kien's story

해체주의 건축 본문

Store of Knowledge

해체주의 건축

imkien 2016. 8. 10. 01:17




*해체주의
 
해체주의는 현대 프랑스철학 아니 프랑스 철학을 넘어 현대철학의  태두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가 발전시킨 철학이다.

데리다 의 해제주의는 초기에는 문학 비평에 널리 사용되었다.
데리다 의 해제주의는문학 작품을 일관되고 확정적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어떠한 형식의 행위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그 까닭은 문학에는 항상 그리고 이미 상충적인 의미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것들에 의해서
행위 그 자체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기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문학의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문학 해석의 한방식;을 기술 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주의는 문학을 넘어 시각예술과 건축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해체주의 건축이라는 용어는 존슨과 위글리로부터 비롯된것으로 그들은 새로운 건축 경향을 소개하기위해
해체주의 건축이라는 용어를 MoMa 전시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해체주의 건축을 철학 혹은 문학에서의 해체주의 이론의 적용이 아닌
20세기초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으로부터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해체주의 건축의 발현을 건축 역사의 틀안에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역사의 틀을
현대 상황과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건축가들 특히 아이젠만, 츄미등이 표명했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건축가들은 이러한 시각에 좀더 공감하는 경향을 띤다
해체주이 건축을 읽어내고 주장하면서 사물을 대하고 인식하는 태도변화 혹은 새로운 정신성의 터짐을
아이젠만은 탈인본주의(Post-Humanism)혹은 탈기능주의(Post-Funcyionalism)이라고 지칭했다.
 
<해체주의 건축의 부상>
존슨과 위글리는 1988년 MoMa의 초빙으로 다니엘 리에스킨트,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렘 콜하스,
피터 아이젠만, 쿱 힘멜블라우 , 버나드 츄미등 7명의 건축가와 함께 '해체주의 작품'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전시했다 . 이 전시회의 의미는 '해체주의 건축'이란느 용어가 최호로 순수 건축 매체를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라는 큰 의미를 지닌다.


필립 존슨은 <해체주의 건축>의 서언에서 주제의 정당성을 2가지로 압축해서 이야기했다.
 
1.1980년대 이후 세계의 다양한 지역 건축가들의 작품들에서 형태상의 유상성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2.해체주으 건축이 보여즈는 그러한 새로운 형태들은 1910~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를 원점으로 삼고있다.
 
이때 초청된 7인의 건축가들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지리적 문화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형태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해체주의 건축이 어느 특정지역이나 국가에섬나 목격되는 것이 아닌 전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인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글리 또한 해체주의 건축이 '해체'로 알려진 현대 철학의 방식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
건축의 전통에서 부상하여 우연히 몇몇 해체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것 이라 주장했다.
 
필립 존슨은 두 대조적 아이콘을 통해 해체주의 건축이 러시아 구성주의를 포함한 더 큰 맥락에서의
모더니즘 미학에 반해 어떤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지 기술 했다.
그 두아이콘은  Self-Alingning Ball Bearing과 Micheal Heizer가 찍은 네바다의 육류저장소이다.


 
필립존슨이 해석하는 틀안에서 볼베이링은 유일하고 명확하며 플라톤적이고 엄격한것으로
<완전성>을나타내고  육류저장소는 어지럽고 탈구되어있으며 비밀 스러운것 으로
 <흠집난 완전성>의 의미를 나타낸다.
여기서 전자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모더니즘 미학을 후자는 해체주의 미학을 대변한다.
 
이러한 대비는 해체주의 건축의 '비틀린'이미지와 국제주의 양식으로 '순수한'이미지의 대조와 같은것이다
필립존슨의 시각에서 해체주의 건축이 모더니즘 미학과 구별되는 특징은
완전성과 순수성에대한 회의와 부정이라는 것이다.
 
위글리 역시 해체주의 건축의 특질은  '순수한 형태의 꿈'을 부수는데 있다고 봤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건축은 항상 무엇보다도 안정성과 질서를 제공하는
중심문화 제도로 존립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불안정성과 혼란이 제공된 공간을 늘 꿈꾸게되었고
이때문에 건물들이 단순한 기하학의 형태 즉 입방체, 원통, 구, 원뿔, 피라미드등을 기본 형태로 하고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결합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조합롭게 이루도록 하는 것이
건축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 건축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인 수준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데 한편에서
보면 안전하고 온전하고 순수한 무엇은 그 온전함과 순수성을 위협하는 무엇을 끊임없이
축출하거나억눌러 자신을 유지 하기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이 존재방식과 의미 기반을 자신이 분리하고 억합하는
바로 그것에기대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함과 순수성은 자신을 위협하는 무엇을 떼어내고 소원시키는 힘으로
'온전하고 순수하게'존재하고 있는듯 보여지지만
실상 그 존재기반은 절대 순수하고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온전함과 순수성은 자신의 품안에 비틀림과 불순함을 은닉시켜 두고 있다.
해체주의 건축은 그러한 은닉된 비틀림, 억압딘 불순함
내재적인 딜레말르 무대에 올려 존재론적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것 이라고
위즐리는 주장했다.
또한 위글리는 해체주의 건축과 러시아 구성주의의 관계를 고찰했는데
그에 따르면 러시아 구성주의는 건축의 전통을 급진적을 뒤틀어
전통에 틈을 만들어 그곳에서 무엇인가 교란시킬 건축적 어떤 가능성을 제공하였다고 봤다.
그리고 그러한 틈새에서 발생된것이 바로 해체주의 건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해체주의 건축이 구성주의로 부터 연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어가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급진적으로
탈선하길 기대하고 있다라고 봤다.
 
그러나 존슨과 위글리의 이러한 시각은 편향적인 시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한계 때문에
그들의 이론은 데리다의 '차별철폐적 건축'(Affirmative Arcitecture)의 개념에 온전히 흡수될 수 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했다.


Comments